Thursday, April 16, 2026

🤍 רחמי האלוהות ורודולף הס 🤍 3 באפריל 2016 🤍

  יום א' ה2- של תחייתו של האדון (רחמי האלוהים) (שנה א')

הנה תרגום הדרשה לעברית מודרנית, תוך שימוש במונחים קתוליים מקובלים ובנוסח מקראי הנהוג בתרגומים קתוליים לעברית:

מכל הדברים שאפשר לדבר עליהם בעונת הפסחא היפה הזו, מתוך הקריאות הליטורגיות, נדמה שבזמן הזה הכנסייה כמעט מכריחה אותנו למקד את תשומת לבנו ביסוד אחד במיוחד: הרחמים. לא רק שזהו יום ראשון של הרחמים האלוהיים, אלא גם שנת יובל של רחמים. וזה נעשה נושא חוזר בהוראת הכנסייה לאחרונה — מה שאפשר לכנותו ההיבט העמוק והיפה ביותר של דתנו כולה: רחמי האל.

ובו בזמן, תמיד קיימת סכנה שכאשר מדברים שוב ושוב על דבר מה — כמו באינפלציה — ערכו הולך ונשחק, עד שאמירות כמו “האל הוא אהבה” או “האל רחום” הופכות לקלישאות ריקות. כאילו היו כתובות על שקיות נייר ממוחזר: “90% נייר ממוחזר… אגב, האל הוא אהבה. הוא רחום.” הדבר כמעט נהפך לקריקטורה של הדת הנוצרית.

ובייחוד כאשר מעמידים זאת מול דברים רבים אחרים שהדת מלמדת אותנו. הייתי רוצה לקוות — אך איני יכול להבטיח — שכאשר אדם נכנס לכנסייה קתולית, לפחות בענייני דוקטרינה, הוא לא ישמע דעות אישיות. כי בעניינים אלו — הדוקטרינה — הכנסייה אינה עוסקת בדעות. משום כך יש לנו כנסייה שאינה טועה (אינפאליבילית), ולכן יש לנו מגיסטריום.

והכנסייה מלמדת אותנו על אחרית האדם — ארבעת הדברים האחרונים: המוות, הדין, גן עדן וגיהינום. היא מלמדת על טבע הצדק ועל טבע הרחמים. ולכן, אם אנו רוצים להבין באמת את עומקם ויופיים של הרחמים, עלינו לשקול אותם גם מול מקבילם: הצדק האלוהי.

די להביא תמונה אחת חזקה, אולי אף מטרידה: הקדושה תרזה מאווילה, דוקטורית של הכנסייה, מיסטיקנית כרמליטית גדולה, ראתה באחד מחזיונותיה את המון האנושות נופל לאבדון כפתיתי שלג.

והמטפורה הזו — לא שלי אלא שלה — מקבלת חיזוק גם מההתגלות הגדולה של פטימה, שבה ראו ילדי הרועים דבר דומה. והתמונה המפחידה הזו רק מדגישה את מה שאמר אדוננו לפני אלפיים שנה:
“כִּי צַר הַשַּׁעַר וְקָשָׁה הַדֶּרֶךְ הַמּוֹבִילָה לַחַיִּים… וּרְחָבָה הַדֶּרֶךְ הַמּוֹבִילָה לָאֲבַדּוֹן” (מתי ז׳:י״ג–י״ד).

אם כן — מה נאמר על רחמי האל?

לעיתים מציגים את האל כמעין דוד חביב עם זקן אפור — מעין “סנטה קלאוס שבשמים” — המקבל כל אחד בשערי הפנינה ואומר: “אל תדאג, הכול בסדר.” אך זה עומד בניגוד לתמונה המקראית, שבה אהבת האל היא אהבה קנאית, “אֵשׁ אֹכְלָה” (דברים ד׳:כ״ד).

כיצד ניישב בין התמונות הללו? אלו אינן שאלות מופשטות — הן מהשאלות האישיות והדוחקות ביותר של קיומנו.

בבשורות שואלים את האדון שוב ושוב:
“מָה עָלַי לַעֲשׂוֹת כְּדֵי לָרֶשֶׁת חַיֵּי עוֹלָם?” (לוקס י״ח:י״ח).

גם אני רוצה לדעת: מה עליי לעשות כדי להיוושע?

(המשך הסיפור:)

היה אדם בשם רודולף הס, מפקד אס־אס גרמני ואחראי למחנה ההשמדה אושוויץ. הוא היה אחראי אישית למותם של בין שניים לשניים וחצי מיליון בני אדם.

ובאופן מסתורי בהשגחת האל, בין האנשים הרבים ששלח למותם היה גם כומר ישועי — שאותו שחרר במפתיע.

לאחר המלחמה נתפס, נשפט ונידון למוות. בעת שהמתין להוצאתו להורג, פחדו הגדול לא היה המוות עצמו, אלא שיקבל יחס אכזרי כפי שנתן לאחרים. אך להפתעתו, היחס שקיבל היה אנושי.

דבר זה נגע בלבו. והוא — שהיה תינוק שהוטבל בכנסייה הקתולית — ביקש לראות כומר.

אך אף כומר לא הסכים לבוא.

לבסוף נזכר בכומר הישועי ששחרר בעבר. מצאו אותו — והוא בא.

הס התוודה וידוי שלם, בדמעות רבות, וקיבל מחילה. ימים ספורים לאחר מכן קיבל את הקומוניון הקדוש — גופו של אדוננו — לראשונה מאז ילדותו, זמן קצר לפני הוצאתו להורג.

מה אנו לומדים מכך?

אם דמו של השה התמים — המשיח — יכול למחוק אפילו את חטאיו של אדם כזה, הרי שזו רחמים נוראים ונפלאים כאחד.

אך יש כאן גם נקודה נוספת: הסליחה.

ייתכן שאותו אדם נמצא כעת — אם שב בתשובה באמת — עם הקדושים בכבוד השמים, לצד מרים הבתולה, יוסף הקדוש, פטרוס ופאולוס.

ומנגד — ייתכן שישנם כמרים שלא סלחו — ואיבדו את הישועה.

איזו ניגודיות חריפה.

הרי המשיח לימד:
“סִלְחוּ אִישׁ לְרֵעֵהוּ… כַּאֲשֶׁר גַּם ה׳ סָלַח לָכֶם” (קולוסים ג׳:י״ג).
“אִם יַכֶּה אוֹתְךָ אִישׁ עַל לֶחִי יְמִינֶךָ — הַטֵּה לוֹ גַּם אֶת הַשְּׂמֹאל” (מתי ה׳:ל״ט).
“לֹא עַד שֶׁבַע פְּעָמִים… אֶלָּא עַד שִׁבְעִים פְּעָמִים שֶׁבַע” (מתי י״ח:כ״ב).

ובתפילה שלימד אותנו האדון — “אבינו שבשמים” — אנו אומרים:
“וּסְלַח לָנוּ אֶת חוֹבוֹתֵינוּ כַּאֲשֶׁר סוֹלְחִים גַּם אֲנַחְנוּ לַחַיָּבִים לָנוּ.”

ביום שישי הטוב, הגנב הטוב אמר:
“זְכָרֵנִי… בְּבוֹאֲךָ בְּמַלְכוּתֶךָ”
והאדון השיב לו:
“הַיּוֹם תִּהְיֶה עִמִּי בְּגַן עֵדֶן” (לוקס כ״ג:מ״ג).

לעומת זאת, פטרוס הקדוש כפר בו באותו יום.

וכבר נאמר ביחזקאל:
“חַי אָנִי… אִם אֶחְפֹּץ בְּמוֹת הָרָשָׁע… כִּי אִם בְּשׁוּבוֹ מִדַּרְכּוֹ וְחָיָה” (יחזקאל ל״ג:י״א).

אין זה עניין של קשיחות או רכות — אלא של אהבה.

אהבת האל דורשת את כל כולנו. כמו בנישואין — נאמנות שלמה.

אך בניגוד לאהבה אנושית, האל תמיד מוכן לקבל בחזרה כל מי שבא בתשובה אמיתית.

כאשר אנו אומרים:
האל הוא אהבה — Deus Caritas Est
האל רחום — Misericors est Dominus

אין אלו קלישאות — אלא אמת החודרת עד עומק הקיום.

כולנו זקוקים לרחמים.

“לֵב נִשְׁבָּר וְנִדְכֶּה… לֹא תִבְזֶה” (תהלים נ״א:י״ט)
“אִם יִהְיוּ חֲטָאֵיכֶם כַּשָּׁנִים — כַּשֶּׁלֶג יַלְבִּינוּ” (ישעיהו א׳:י״ח)

אך הכול תלוי בתשובה אמיתית.

הדרך לחיים צרה — אך הרחמים פתוחים לכל הקורא.

וכמו במשל הבן האובד — האב מחכה תמיד, קורא תמיד, ומזמין אותנו לשוב.

בשם האב, והבן, ורוח הקודש. אמן.

Saturday, April 11, 2026

🤍 하느님의 자비와 루돌프 회스 🤍 강론 · 설교 🤍 천주강생 2016년 04월 03일 🤍

[English]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천주교 샬럿교구 제이슨 크리스천 신부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많은 주제 중에서, 이 아름다운 부활절 시기에 교회는 지금 이 순간에
우리에게 한 가지 요소에 집중하도록 사실상 강요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바로
‘자비’입니다. 지금은 ‘하느님의 자비 주일’일 뿐만 아니라 ‘자비의 희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최근
교회의 가르침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는 우리 종교 전체에서 가장 심오하고 아름다운
측면이라 할 수 있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하지만 어떤 주제에 대해 계속 이야기는 것은 위험이 따릅니다. 마치 초인플레이션처럼 그 가치가
점점 줄어들어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나 “하느님은 자비로우십니다” 같은 말이 진부한 상투어로
전락해 버릴 수 있습니다. 마치 “90% 재활용 종이 사용… 그런데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자비로우십니다.”라고 적힌 종이봉투 옆에 있는 문구처럼요. 이런 표현은 거의 그리스도교 신앙의
희화화처럼 되어버렸습니다. 특히 우리 종교가 가르치는 다른 많은 것들과 비교해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적어도 교리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가톨릭 교회에 들어갈 때 결코 ‘의견’을 듣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를 바랄 뿐,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리는 교회가 ‘의견’을 다루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류가 없는
교회를 가지고 있고, 교도권(Magisterium)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에게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칩니다—즉 ‘마지막 네 가지 (사말교리)’: 죽음, 심판, 천국, 지옥, 또한
정의와 자비의 본질. 자비의 진정한 깊이와 아름다움, 경이로움을 이해하려면 그것의 대응 개념인
‘하느님의 정의’와 함께 저울질해야 합니다. 아주 인상적이지만 다소 불편한 이미지를 하나 떠올려
보면,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교회 학자이자 위대한 카르멜회 신비주의자였던 아빌라의 테레사
성녀는 그녀의 환시에서 인류의 대다수가 눈송이처럼 멸망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비유—제 비유가 아니라 테레사 성녀의 비유—는 20세기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예언적 발현 중 하나인 파티마의 발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환시를 본 목동 아이들이 매우 유사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 무서운 이미지는 2000년 전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더욱 생생하게 그려주는 듯합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어렵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다고 하셨죠 (마태복음 7:13-14).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때때로 하느님은 마치 하늘의 산타클로스처럼, 회색 수염을 가진 유쾌한 삼촌처럼 희화화되어,
모든 사람이 천국 문에 도착하면 등을 두드리며 “걱정하지 마. 다 괜찮아.”라고 말하는 존재로
축소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서은 하느님의 사랑을 질투하는 사랑, 소멸하는 불로 묘사합니다
(신명기 4:24). 우리는 이런 이미지들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이미지들, 그리고 구원의 어려움과 그분의 한계 없는 깊은 자비 - 이는 추상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존재에서 가장 시급하고 개인적인 질문이어야 합니다.

복음서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 우리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루카 18:18). 저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싶습니다. 내가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 인생 전체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습니다.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보다 더 절박한 것이 없죠. 저는 주님과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난 몇 년간 제 말을 들어오신 분들은 제가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주제에 빠지는 것을
좋아한다는 걸 아실 겁니다. 하지만 최근에 접한 한 이야기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수많은
논문보다도 이 모든 요소를 더 잘 요약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이야기는 몇 주 전 Winslow 신부님이 제게 들려주신 것이었고, 저는 그 이야기를 전에 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아직도 일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이야기이며, 누구나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하느님의 자비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 그리고 어쩌면 그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루돌프 회스라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독일 SS 지휘관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죽음의
수용소인 아우슈비츠를 관리했습니다. 루돌프 회스는 아마도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자일
것입니다. 물론 히틀러도 있었고, 스탈린도 있었고, 마오쩌둥도 있죠. 이들은 수억 명의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회스는 자신의 증언에 따라 200만에서 250만 명 사이의 사람들을 직접
처형했다고 말했습니다.

비교를 위해 예를 들자면, 팬서스가 경기를 하는 뱅크 오브 아메리카 스타디움은 약 7만 명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계산해보면, 가득 찬 경기장 7만 명에서 200만~250만 명까지 얼마나 많은
차이가 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가톨릭 신자, 불가지론자, 그 외 모든
사람들—남녀노소를 포함해—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직접 감독했습니다. 대량 총살, 화형,
가스실 등 끔찍한 방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하느님의 섭리 속에서 그가 죽음으로 보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예수회 신부 한 명이 그에게 보내졌습니다.

그날 그의 어둡고 뒤틀린 영혼 속에 어떤 생각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는 동전을
던지며 “오늘은 평소와 다른 일을 해볼까? 사람을 수천 명씩 죽이는 것도 지겹군.”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에게 보내진 이 신부님 [Władysław Lohn 신부, SJ]은

뜻밖에도 풀려났습니다. 그가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엄청난 일이었지만,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이 아니었다면 역사 속에 알려지지 않았을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회스와 같은 전범들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즉시 인류에 대한 가장 끔찍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는 사형을 기다리는 동안, 자신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평생 다른 사람들에게 가했던 잔혹하고 끔찍한
대우를 자신도 받게 될 것이라는 예상이었습니다. 그런 대우를 받아야한다면 죽음이 오히려
안식처럼 느껴졌겠지요. 그런데 그는 감옥에서 간수들과 관리인들에게 받은 대우가 잔혹하거나
끔찍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이었다는 사실에 놀랐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당황했습니다.

그 간수들과 관리인들 중에는 그가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의 가족—어머니, 아버지, 자녀—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가 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것은 그의 어두운 세계관 속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을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유아 시절에
세례를 받은 가톨릭 신자였던 루돌프 회스는—매우 흥미로운 지점입니다—어떤 회심을 느끼고
신부를 부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제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으니 주목해 주세요. 루돌프 회스가 간수들에게 신부를 찾아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들은 그 요청을 따랐습니다. 신부가 루돌프 회스를 방문하도록 연락을 보냈습니다.
그러나-가톨릭 사제직 역사에서 매우 슬픈 이야기입니다-어떤 신부도 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요. 이 남자는 250만 명의 피를 손에 묻힌 자이며, 그
피는 하늘을 향해 정의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 신부들 중 일부는 아마도 가족 전체를 수용소에서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런 사람에게 “당신의 죄를 용서합니다”라고 말하며
사제의 오른손을 들어야 하는 책임의 무게를 상상해 보세요. 그 일을 하려는 신부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루돌프 회스는 자신이 한 번 풀어준 적이 있는 예수회 신부를 기억해냈습니다. 수년이
지난 후 그 신부가 살아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는 그 신부를 묘사하며, 아직 살아 있다면
찾아서 감옥으로 와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놀랍게도, 그 신부를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루돌프 회스를 감옥에서 방문했습니다. 부서진
마음과 수많은 눈물 속에서 오랜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의 삶 전체를 고백했고, 그 신부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며칠 후, 그 신부는 그에게 성체를 가져왔습니다. 어린 시절 이후로 그의
입술에 닿은 적 없던 성체를, 그는 처형 직전에 받아 모셨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에게 가장 강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마도 하느님의 자비의 깊이일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대로라면—흠 없는 어린 양의 고귀한 피가 세상의 모든 죄의 저울을 뒤집을 만큼
충분하다면, 200만 명의 피가 그의 손에 묻어 있었음에도 그 피가 어린 양의 피로 지워질 수
있다면—그 자비는 우리가 이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섭고, 훨씬 더 놀라운 것입니다.

저는 부모님과 형제자매 모두 살아 계신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잔혹하게
살해당했고, 그 가해자가 제 고해소에 나타났다면—그리고 그가 진심으로 회개했다고 가정해
봅시다—저는 교회가 요구하는 대로 그에게 죄의 용서를 줄 수 있을까요? 그러길 바라지만,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깊이 묵상하며 우리의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정성을
시험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하느님은 상상의 상황에 상상의 은총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마주하는 현실의 상황에 실제 은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에게 하느님은 우리가 실제로 감당해야 할 만큼의 은총을 주십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루돌프 회스를 용서하라는 요청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고, 어쩌면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더 미묘한 지점이지만, 결코 덜 인상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가장 생생한 대비를 그려보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 외적인 모습만으로 판단하자면—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죠—저는 개인에 대해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려는 시도는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외면만 보지만 하느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관찰 가능한 것에 근거해 결론을 내리자면, 루돌프 회스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경건하게 성사를 받았다면, 지금 이 순간—아직 연옥에서 남아있는 죄를 닦아내고 있지
않다면—그는 천국의 영광 속에서 성인들과 함께 빛나고 있을 것입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
요셉,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그리고 다른 모든 성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말입니다. 어쩌면
그가 이 세상에서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수많은 사람들과도 함께일지도 모릅니다. 마치 한때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성 스테파노를 돌로 쳤던 사람이 지금은 성 바오로가 되어 천국에서 함께 서
있는 것처럼요.

그러나 가장 극명한 대조는 아마도 이것일 것입니다. 이 모습 옆에, 평생 복음과 가톨릭 교리를
열심히 설교하고 가르쳤다고 가정되는 여러 가톨릭 신부들의 모습이 있다고 해봅시다. 그들은
성사를 정성껏 집전했고, 수만 명에게 죄의 용서를 베풀었으며, 날마다 거룩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교회에 대한 순명, 정결한 독신, 단순한 삶을 서약했지만, 복음의 가장 기본적인
계명 중 하나—우리가 용서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는 말씀(콜로새서 3:13)—에
응답하지 못한 탓에, 그들이 지옥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회개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극적인 대조입니까. 평생을 고문과 살인에 바친 한 남자가 지금 이 순간 천국에 있을 수도
있고, 반면에 용서의 사역자로서, 다른 그리스도(alter Christi)로서, 가톨릭 사제로서, 단지 감옥에
있는 그를 방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용서를 거부한 사람들이 지옥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들이 그 죄를 회개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처음부터 아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종교의 초자연적인 요소 중 하나라는 것을요. 누군가 당신의
뺨을 때리면 다른 쪽 뺨도 돌려대라(마태복음 5:39). 누군가 당신을 모욕하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마태복음 18:22). 내가 너희를 위해 내 생명을 내어준 것처럼,
너희도 다른 사람을 위해 생명을 내어주어야 한다(요한복음 10:18; 15:13).

그리고 우리가 결코 잊지 않도록, 우리 구세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주님의 기도—의 일곱 가지
청원 중 하나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입니다.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받을 것이다(마태복음 7:2). 이 모든 것을 현대적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어떤 사람들은 아직 살아 있는 기억 속에 있고, 분명히 역사책 속에서는
생생히 살아 있는 인물들이기에 더욱 인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 대조, 하느님의 자비라는 놀라운 역설은 성서 전체에서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우리가 불과 일주일 전 기념했던 성금요일을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이런 가정을 해보세요. 만약
세상이 성금요일에 끝났다면? 그날, 그 순간까지 매우 악하게 살아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 마지막 순간에, 그는 자신과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옆에 있는 사람이 단순한
인간 그 이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정당한 벌을 받고 있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루카복음 23:40–42). 그리고 그 악한 남자—이제는 모든 시대에 걸쳐 ‘착한
도둑’으로 알려진 그는—성서 전체에서 가장 복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복음 23:43)

다시 한 번, 복음서의 또 다른 주요 인물과 극명한 대조를 그릴 수 있습니다. 그는 얼마 전
그리스도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우리에게는 무엇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던 사람이었습니다(마태복음 19:27). 만약 세상이 성금요일에 끝났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안
좋은 결말”였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초대 교황이었습니다. 그는 성 베드로였습니다. 만약 그날
세상이 끝났다면, 역사 속에서 그의 이름 앞의 “성(Saint)”이라는 칭호는 지워졌을 것이고, 그는 착한
도둑과는 반대편의 심연에 있었을 것입니다.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 아닐까요? 주님을 그렇게 열심히 따랐던 성 베드로가, 모든 것이 걸려
있던 그날에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루카 22:54–57, 59–62; 마르코 14:69–70; 마태오

26:73–75; 요한 18:13–27)라고 단호히 부인하고 주님의 수난에서 도망쳤다는 사실 말입니다. 반면,
착한 도둑은 “나는 정당한 벌을 받고 있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성서에서 이미 반복적으로 말해온 바를 반영합니다. 예를 들어 에제키엘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악한 길에서 돌아서기만 하면, 아무리 오래 그 길을
걸었고 아무리 중대한 죄를 지었더라도, 내가 그를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 것이다”(에제키엘 33:11).
그러나 “누구든지 아무리 오랫동안 선의 길을 걸었더라도, 죄를 받아들이고 악을 행하면 나는 그를
버릴 것이다”(에제키엘 33:12).

이 말이 매우 가혹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선하게 살려고 노력해온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성 베드로는요? 가혹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가혹함이나 관대함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표현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모든 것은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고 잘 알려진 개념 중
하나입니다. 바로 ‘사랑의 본질’입니다. 에제키엘이 말한 것, 성금요일에 성 베드로와 착한 도둑
사이의 대조, 용서하지 않은 가톨릭 사제들과 대량 학살자 루돌프 회스 사이의 대조에서 작동하는
원리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그분의 사랑의 확장이며, 질투하는 사랑이며, 소멸하는
불과 같아서,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이 우리 전체를 원합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어떤
배우자가 이런 상황에 만족할 수 있을까요?

만약 수년간의 결혼 생활 후, 한 배우자가 다른 배우자의 불륜을 알게 되었다면, 이런 식의 변명이
만족스러울 수 있을까요?

“그동안 나는 충실했어. 수년 동안 말이야. 그런데 단 한 번의 실수로 나를 비난하려는 거야? 사실
얼마나 자주 유혹을 받았는지 너는 몰라. 그 유혹을 이겨낸 것만으로도 너는 감사해야 해. 그러니까
나한테 좀 관대하게 대해줘야지.”

우리는 종종 하느님께 그렇게 대하지 않나요? 그분께 우리가 얼마나 인내했는지를 상기시키며
관대함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의 본질을 상기시키십니다. 어떤
배우자든—특히 오랜 결혼 생활 후에는 더욱—“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당신은 온전히 내 것이고
나는 온전히 당신의 것이다”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불륜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결론입니다, 어떤 인간적인 연인과도 달리, 완전한 충실함을 요구하시는
질투하시는 신적인 연인은, 진심으로 마음 깊이 용서를 구하는 자라면 누구든지 받아들이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의 기대를 조금 뒤흔들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말할 때: Deus Caritas Est, “하느님은 자비로우십니다”라고
말할 때: Misericors est Dominus,
하느님의 자비의 진정한 본질과 경이로움에 대해 불편한 질문을 던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존재의 중심을 꿰뚫는 진리입니다. 단순한 상투어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자비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우선 저부터요. 하지만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절대적인 충실함입니다. 단 하나의 중대한 죄라도 그분과의 우정을 영원히 끊어놓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가장 기본적인 계명을 지키지 않은 일부 사제들에게 일어났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너희를 용서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 그런데도 루돌프 회스 같은 역사상
가장 끔찍한 인물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의 힘이며, 아름다움이며,
경이로움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비가 우리 종교의 중심에 있는 이유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이
자비를 기념하기 위해 아름다운 축일을 제정한 이유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 ‘하느님의 자비 주일’, 부활절의 마지막 팔일 축제일에,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자비의 품에 맡깁시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마음만 있다면,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맡깁시다. 시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 겸손하고 회개하는 마음을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시편 50(51):19).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죄가 주홍빛 같을지라도 내가
그것을 눈처럼 희게 하리라”(이사야 1:18).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진정으로 마음에서 깊이 우러나는
회개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사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면 반드시 참된
것이겠죠—“구원으로 이끄는 길은 좁”습니다(마태복음 7:14). 성인들과 신비가들은 인류의 광대한
무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자비를 무시했고,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자비를 당연히 여겼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비를 간절히
외치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방탕한 자식을 기다리는 아버지, 즉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가 계십니다.
항상 기다리시고, 항상 부르시며, 항상 찾으시고, 우리를 그분의 자비의 품으로 초대하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Wednesday, April 8, 2026

마태오 28,8-15 📖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 복음과 미술

마태오 28,8-15 

그때에 8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9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11 여자들이 돌아가는 동안에 경비병 몇 사람이 도성 안으로 가서, 일어난 일을 모두 수석 사제들에게 알렸다. 12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13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14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15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 말이 오늘날까지도 유다인들 사이에 퍼져 있다.


그림에 대한 묵상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반대가 그분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그분의 부활마저도 저항을 받았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가 거부되고 끝에 이르렀던 것처럼, 빈 무덤의 진실 또한 침묵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종교 지도자들은 모여 이를 덮어 버릴 이야기를 꾸며냈다. 곧 제자들이 밤에 와서 시신을 훔쳐 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범죄자로 처형된 분의 제자들마저도 속이는 자들로 몰아가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왜곡의 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권력자들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끝낼 수는 있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까지 끝낼 수는 없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숨어 계시지 않으셨다. 먼저 믿음을 가지고 무덤에 온 여인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고, 이어 갈릴래아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사도 바오로가 훗날 증언하듯이, 많은 이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으며, 그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편지를 쓸 당시에도 그들 가운데 일부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참으로 많은 사람이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다. 그리고 그분을 뵌 이들은 침묵할 수 없었다. 그들은 증인이 되어 유다인과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그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선포하였다. 한때 억눌렸던 것이 이제는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그것은 막을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우리 역시 이 부활의 움직임 안으로 초대받고 있다. 곧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만남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무덤에 갔던 여인들처럼, 예루살렘의 사도들처럼,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뵌 수많은 증인들처럼, 우리는 그분을 만나고 그 체험을 우리 안에만 간직하지 말도록 부름받고 있다. 부활의 기쁨은 결코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나누어지고, 선포되고, 삶으로 드러나기를 바란다. 믿음은 강요로 퍼지는 것이 아니라, 증언을 통해 퍼져 나간다.


오늘의 그림은 십자가(왼쪽 패널에 묘사됨) 이후와 부활(오른쪽 패널에 묘사됨) 이후에도 이야기가 끝나지 않음을 보여 준다. 오른쪽 패널의 배경에는, 거의 조용히 드러나듯,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인다. 약 1510년경에 제작된 헤라르트 다비드의 이 작품은 본래 더 큰 제단화의 날개 부분이었다. 이 패널들 안에서 십자가형은 성금요일의 어둠에 우리를 붙들어 두고, 부활은 전경에서 힘차게 터져 나오며, 그리고 배경에서는 그 사건의 참된 여파가 부드럽게 드러난다. 곧 예수님께서 만나 주시고, 믿음이 퍼져 나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역동성이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마음은 타오르고, 그 소식은 퍼져 나간다.


Christ Carrying the Cross, with the Crucifixion; The Resurrection, with the Pilgrims of Emmaus, Painting by Gerard David (ca. 1455–1523), Painted circa 1510, Oil on oak panel ©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출처 : https://christian.art/daily-gospel-reading/matthew-28-8-15-2026/

마태오 28,1-10 📖 주님 부활 대축일 - 낮 미사 🎨 복음과 미술

마태오 28,1-10 

1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2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그리고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무덤으로 다가가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 그 위에 앉는 것이었다. 3 그의 모습은 번개 같고 옷은 눈처럼 희었다. 4 무덤을 경비하던 자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 떨다가 까무러쳤다. 5 그때에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6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와서 그분께서 누워 계셨던 곳을 보아라. 7 그러니 서둘러 그분의 제자들에게 가서 이렇게 일러라.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알리는 말이다.” 8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9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림에 대한 묵상

십자가의 시간에 이르러, 세상 위에 기묘한 어둠이 내려앉습니다. 복음사가들은 이를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가 아니라, 창조 세계의 근본 자체에까지 닿는 무엇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마치 빛 자체가 거부된 사랑의 모습을 보고 물러서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참으로 강렬한 이미지입니다. 갈바리아는 단순히 고통의 장소가 아니라, 희망이 가려진 듯 보이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어둠을 알아봅니다. 그것은 슬픔의 어둠이며, 혼란의 어둠이고, 응답받지 못한 기도의 어둠이며, 일자리의 상실과 재정적 어려움의 어둠입니다. 인생 여정의 어느 순간이든 모든 인간의 마음을 찾아오는 어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결코 우리를 그 자리에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 거의 조용히, 거의 다정하게, 새로운 빛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바로 새벽의 빛입니다. 오늘 복음(마태오 28,1-10)에서 여인들이 이른 아침 무덤으로 걸어갈 때, 그 빛은 다시금 부드럽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직은 연약한 빛, 망설이는 듯한 새벽 첫빛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한 걸음을 내딛기에 충분하고, 희망을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부드러운 빛은 훨씬 더 밝은 빛으로 바뀝니다. 곧 부활의 빛입니다. 그 순간 그들의 슬픔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화됩니다. 두려움은 경외로 바뀌고, 애도는 예배로 변합니다. 어둠은 결코 마지막 말을 하지 못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은 가장 깊은 밤조차 빛이 태어나는 자리가 될 수 있음을 선포합니다.


예술가들은 언제나 이 빛의 신비를 탐구해 왔습니다. 수세기에 걸쳐 그들은 캔버스 위에 붓을 들고 어둠과 빛을 씨름하며, 단순히 장면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깊은 무엇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예술가의 붓 안에서 빛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더해지는 것입니다. 빛을 통해 캔버스는 생명을 얻습니다. 아마도 빛을 가장 의식적으로 추구했던 이들은 인상주의 화가들이었을 것입니다. 클로드 모네,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카미유 피사로, 에드가 드가와 같은 화가들은 빛을 단순히 중요한 요소로 본 것이 아니라, 작품의 주제 그 자체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강가와 들판, 성당과 도시의 거리 앞에 서서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빛의 순간을 포착하고자 했습니다. 감히 말하자면, 그들의 작품 안에서 빛은 거의 성사적인 것이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이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성당에 갈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이미지는 클로드 모네의 「루앙 대성당, 서쪽 정면, 햇빛」입니다. 이 작품은 1894년에 그려졌으며, 모네가 1892년부터 1894년 사이에 제작한 30점이 넘는 연작 중 하나로, 모두 루앙 대성당의 같은 정면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는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를 스스로에게 부여했습니다. 건물 자체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내려앉는 빛을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끊임없이 변하고 반짝이며 결코 머물지 않는 빛을 말입니다. 그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캔버스를 옮겨 다니며, 아침의 빛과 한낮의 밝음, 저녁의 빛이 동일한 돌을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순간을 포착하고자 했습니다.


이 작품은 부활을 위한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성당은 무덤처럼 단순한 돌 구조물이 아니라, 빛이 스며들어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장소입니다. 모네는 가장 오래되고 움직이지 않는 벽조차도 빛에 의해 변모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이 부활은 세상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을 천천히, 부드럽게, 그리고 영광스럽게 빛으로 채우며…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


Rouen Cathedral, West Facade, Sunlight, Painting by Claude Monet (1840–1926), Painted in 1894, Oil on canvas ©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출처: https://christian.art/daily-gospel-reading/matthew-28-1-10-2026-2/

Friday, April 3, 2026

마태오 28,1-10 📖 주님 부활 대축일 - 파스카 성야 🎨 복음과 미술


마태오 28,1-10 

1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2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그리고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무덤으로 다가가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 그 위에 앉는 것이었다. 3 그의 모습은 번개 같고 옷은 눈처럼 희었다. 4 무덤을 경비하던 자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 떨다가 까무러쳤다. 5 그때에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6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와서 그분께서 누워 계셨던 곳을 보아라. 7 그러니 서둘러 그분의 제자들에게 가서 이렇게 일러라.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알리는 말이다.” 8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9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림에 대한 묵상

오늘은 성토요일입니다. 전례력 안에서 이 날은 다른 어떤 날과도 다릅니다. 낮에는 미사가 없습니다. 오직 성금요일의 슬픔과 오늘 밤 부활 성야에 터져 나올 기쁨 사이에 머무는 깊은 고요만이 있을 뿐입니다. 교회는 무덤에 누워 계신 그리스도의 신비 앞에서 침묵 속에 기다립니다. 오늘 제가 나누는 복음은 사실 오늘 밤 성야의 복음으로, 마침내 부활의 빛이 어둠을 뚫고 비쳐올 그 순간에 선포됩니다. 그러나 그때가 오기 전까지 우리는 그저 기다리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제가 자란 플랑드르에서는 성토요일을 “고요한 토요일”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이 이름을 늘 사랑해 왔습니다. 이 날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담아내기 때문입니다. 고요함과 공허함, 그리고 깨어 기다리는 기대의 날입니다. 제대는 비어 있고, 감실은 텅 비어 있으며, 교회는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하지만, 사실 모든 일이 곧 일어나려 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그림은 지금까지 제작된 성토요일 작품 가운데 가장 강렬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The Body of the Dead Christ in the Tomb에서 Hans Holbein the Younger는 무덤 안에 홀로 누워 계신 그리스도를 보여 줍니다. 그분의 몸은 굳어 있고 생명이 없으며, 좁은 돌판 위에 길게 뻗어 있습니다. 천사도, 애도하는 이들도, 아직은 부활의 어떤 징표도 없습니다. 오직 죽음의 냉혹한 침묵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 사실적인 표현은 거의 충격적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에는 고통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그분께서 참으로 인간 죽음의 깊은 곳까지 들어가셨음을 일깨워 줍니다. 이 그림은 바로 성토요일의 분위기, 곧 세상이 숨을 죽인 채 부활의 새벽을 어둠 속에서 기다리는 그 순간을 그대로 담아냅니다.


이 그림에 깊이 흔들린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은 러시아 소설가 Fyodor Dostoevsky였습니다. 그는 1867년 Basel을 방문했을 때 이 작품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그 강렬함 때문에 간질 발작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그의 아내가 그를 그림 앞에서 떼어 놓아야 했다고 전해집니다. 도스토옙스키는 훗날 “이러한 그림을 보고서는 신앙을 잃을 수도 있다”고 썼습니다. 그를 그토록 깊이 흔든 것은 이 이미지의 가혹할 정도의 사실성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관람자에게 두려운 질문을 던집니다. 만일 여기 누워 있는 분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면, 죽음과 부패의 모든 힘에 그대로 맡겨진 이 모습 속에서 하느님의 승리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러한 갈등은 도스토옙스키에게 큰 매혹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의 영적 고뇌의 핵심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의 소설 The Idiot에서 이 그림에 대해 언급합니다.


The Body of the Dead Christ in the Tomb, Painting by Hans Holbein the Younger (1497/1498–1543), Painted between 1520 and 1522, Oil on panel, 31 x 200 cm © Kunstmuseum, Öffentliche Kunstsammlung, Basel


출처 : https://christian.art/daily-gospel-reading/matthew-28-1-10-2026/